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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다. 경쾌하다.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의 작품들을 보면서 돌아다니는 동선의 감각은 정반대였다. 거장의 머릿속을 전시장에 그대로 펼쳐놓고 탐색한다는 느낌이랄까. 작가의 속내와 개념들이 속속 눈과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20세기 후반 가장 중요한 현대미술 거장으로 꼽히는 프랑스 출신 작가 루이즈 부르주아(1911~2010)의 국내 첫 대규모 회고전 ‘덧없고 영원한'이 지난달 30일부터 펼쳐지고 있는 무대는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이다. 1980년대 초반 지은 이 권위적인 뮤지엄 공간에서 뜻밖에도 시공의 제약을 초월한 장소 큐레이팅의 무한 상상력을 체험하게 된다.



1층 전시장에 들어가면 곧장 만나게 되는 1997년작 유리장 설치조형물 ‘커플Ⅳ’. 검은 헝겊을 둘러씌운 사람모양의 조형물 한쪽 다리를 의족으로 만들어 눈길을 끈다. 1차 대전에 참전해 부상을 입은 부친을 병원에서 돌보면서 봤던 상 재건축규제완화 이용사들의 의수와 의족 이미지들이 작업의 주된 모티브가 됐다. 사람이 일상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는 측면에서 예술과 의족은 같은 의미와 구실을 지닌다는 작가의 지론이 깃들어 있다. 노형석 기자


‘기억하는 예술’의 끝판왕으로 유명한 거장의 전시장은 기실 음산하고 살벌한 기운이 감돈다. 10대 일반사업자 시절 자신의 용모를 귤껍질에 빗대어 희롱한 아버지를 평생 증오해 고기로 썰어 먹고 싶다는 충동을 80여년 지난 90대 노년까지 간직했던 부르주아였다. 그 처참하고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이 핏빛의 식물과 남녀 드로잉, 잘린 몸과 성기 덩어리 등으로 계속 변주되어 나타나는 전시 공간은 시각적으로 충격과 부담을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부르주아 기념사업을 하는 이 학자금대출 신청 스턴재단과 삼성미술관의 기획진은 이런 선입견을 씻어내고 작가의 머릿속에서 명멸했던 의식과 무의식 세계 자체를 시선이 사방으로 교차하는 전시 공간으로 구성하고, 그 안에 시기별 대표작들을 입체적으로 배치하는 기발한 구도를 만들어냈다. 1940년대 회화와 50년대 ‘인물’(Personages) 연작부터, 80년대 몸 조형물, 90년대 ‘밀실’(Cell) 설치 아파트1억대출이자 공간, 말년의 섬유 작업에 이르는 70여년의 다기한 부르주아 작업 이력이 그 안에서 정연하게 풀려갔다.



2층 전시장에 나온 대표작 ‘마망(엄마)’. 호암미술관 정원의 호숫가에 설치된 대형 조형물 ‘마망’보다 훨씬 작은 소품이다. 노형석 기자


부친의 가부장주의와 외도, 이런 사실을 알고도 남편에게 순종하면서 바느질만 하다 세상을 뜬 모친은 부르주아의 평생 작업을 이끈 모티브가 되었다. 이런 부모의 삶을 바라보면서 비롯된 남성과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수학을 전공했던 작가가 자기 고뇌를 조형적으로 녹여내는 과정에서 떠올린 기하학적이고 유기적인 형태들, 정신과 물질의 상반성 등을 담은 것이 회화, 조각, 설치를 망라한 106점의 출품작들이다. 기획진은 작품들의 한결같은 특징이 이런 양가적 요소들의 대립과 조화라고 보았다. 이들이 엉켜 융화되는 과정을 회오리 모양의 나선형 틀을 통해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대형 조형물 ‘커플’을 처음 들머리 홀에 매달았고, 2층 전시의 마지막 공간에도 나선 조형물을 배치해 수미상관식의 얼개로 전시구상을 풀어냈다.
1층은 미국인 미술사학자를 만나 19일 만에 결혼하고 대서양 건너 미국으로 가는 자신의 자화상을 담은 서정적인 그림 ‘도망치는 소녀’(1938년)로 운을 뗀다. 뒤이어 밝은 분위기의 전시장에 초창기의 드로잉과 조각상들이 형성되는 양상을 이성적 의식세계의 맥락에서 보여주지만, 사이사이 어두운 설치물 공간이 비집고 들어오면서 무의식의 심연이 작업에 영향을 미친 경로도 선뜩하게 드러난다. 정연한 토템 조형물 공간을 보자마자 거대한 나무 바퀴가 앞에 놓인 마네킹을 깔아뭉개는 듯한 구도의 ‘파쇄기’ 설치물이 어둠 속에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구도가 그렇다. 1층 말미 붉은 구아슈로 형상화한 ‘꽃 연작’ 12점은 작가 가족의 숫자를 의미하는 다섯 봉오리의 이미지들로만 개별 화폭들을 채워 혈연 관계를 은유하기도 한다.



부르주아 회고전의 1층 도입부에 내걸린 ‘도망치는 소녀’(1938)의 세부. 19일 만에 결혼하고 대서양 건너 미국으로 가는 자신의 자화상을 담은 서정적인 그림이다. 노형석 기자





노년기의 루이즈 부르주아. 국제갤러리 제공


백미는 2층. 거꾸로 작가의 무의식 세계를 주로 펼쳐놓는다. 대표작인 ‘웅크린 거미’(마망)를 들머리에서 보고 길쭉한 유방 돌출 조형물과 머리셋 달리고 양 팔 없는 여성상이 양옆에 진열된 통로를 지나면, 마치 부르주아의 뇌리 속을 훑는 듯 착시를 일으키는 공간들을 떠돌게된다. 제니 홀저의 빛나는 문자 영상을 배경으로 고환 모양의 조형물 ‘개화하는 야누스’와 구부린 인체 모양 조형물 ‘히스테리의 아치’가 매달려있고, 두 작품들을 축으로 핏빛 드로잉들과 모유를 짜내는 엄마의 상이 있는 방, 절규하는 머리통과 옷과 천조각들이 놓인 ‘밀실’ 연작들, 부친의 고기를 찢어 먹는 상상을 펼쳐놓은 붉은빛의 식탁 공간(‘아버지의 파괴’), 부모의 침실을 문짝 틈으로 엿보게 하는 ‘붉은 방’ 같은 설치작품들이 곡선과 직선의 격벽을 타고 사방팔방으로 배치되어 있다. 작가의 말년 이후 실존적 작업 스타일을 눈과 몸을 통해 절절하게 체험하도록 이끄는 구성이다. ‘거미’는 실을 잣고 강인한 모습을 보이지만 가냘픈 다리를 힘없이 지탱한 모습에서 ‘어머니’의 양면성을 상징한다. ‘좋은 엄마’란 설치조형물은 가슴에서 나오는 하얀 실로 모유를 짜는 모습을 표현하면서도 양육으로 자녀에게 묶이게 되는 굴레의 이미지도 담아냈다.



거대한 나무 바퀴가 앞에 놓인 마네킹을 깔아뭉개는 듯한 구도로 배치된 1983년작 설치작품 ‘파쇄기’. 왼쪽 전시장 벽에는 제니 홀저가 남성과 여성의 성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명멸하는 문자이미지들로 풀어놓고 있다. 노형석 기자





2층 전시장. 가장 앞에 매달린 작품이 고환 모양의 조형물 ‘개화하는 야누스’(1968). 그 뒤에 구부린 인체 모양 조형물 ‘히스테리의 아치’(1993)가 매달려있다. 사진 왼편 안쪽에 나란히 놓인 그물망 설치공간 작품 두개는 밀실 연작중 일부다. 핑크색 머리통이 매달린 왼쪽 작품은 ‘밀실 XI-초상’(2000)이고 빨간 머리통이 매달린 오른쪽 작품은 ‘밀실 X-초상’(2000)이다. 노형석 기자


‘덧없고 영원한'이란 전시 제목은 그가 쓴 글에서 나왔다. 어린 시절의 고정된 기억과 자신의 삶을 지나며 유동해온 시간의 극단적 양면을 은유한 말이다. 전시는 그 양극단을 표상한 몸 덩어리 작품들을 치밀하게 구획된 공간 곳곳에 들이면서 부르주아가 파헤치고자 했던 인간 존재의 깊은 의미를 차근차근 보여준다. 그 의미는 개념보다 증오와 불안, 희망 등의 감정을 순도높게 응고시킨 절박하고 숭고한 유기물의 형상과 재료들로 표현된다. 작가가 평생 고심하며 빚어낸 그 유기적 형상이야말로 사조와 이념을 넘어 21세기 현대미술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실력자로 부르주아를 부각시킨 근본 요소다. 1층 전시장 출구 벽에서 생전 작가가 감정에 대해 성찰하며 남긴 경구를 볼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며 개념도 아니다. 내가 재현하고 싶은 것은 감정이다. 갈망하고, 내어주고, 파괴하려는 감정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스 아트갤러리,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 등을 거친 아시아 순회전의 마지막 무대다. 부르주아의 대작 ‘마망’을 들머리 호숫가에 설치해 대표 소장품임을 널리 알려온 호암미술관에서 전시의 마침표를 찍는다는 의미도 있다. 내년 1월4일까지.
용인/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1층에 전시된 부르주아의 90년대 이후 ‘밀실’ 연작중 일부인 ‘밀실-검은 날들(2006)’. 그가 수집한 옷과 천조각, 남근 고환을 연상시키는 금속제 구 등이 철망 공간 안에 놓여있다. 이스턴 재단 소장품이다. 노형석 기자





붉은 조명 아래 폴리우레탄 수지와 목재천으로 식탁 위의 고깃덩이들을 표현한 설치작품 ‘아버지의 파괴’(1974~2017). 식탁에서 자신의 위세를 떠벌이는 부친을 끌어내려 찢고 먹어치우는 광경을 평생 떠올렸다는 작가의 섬뜩한 상상을 실현시킨 작품이다. 노형석 기자





종이에 과슈로 그린 2009년 작 ‘꽃’. 다섯개의 가지와 꽃봉오리는 작가의 유년시절 가족과 결혼 뒤 가족의 숫자를 상징한다고 한다. 노형석 기자





부르주아의 1960년대 대표작으로 꼽히는 ‘무의식의 풍경’(1967~68). 청동덩어리에 검은색을 칠하고 광택을 낸 이 작품은 불룩 솟은 돌기들이 남근들의 귀두를 연상시킨다. 이스턴재단 소장품이다. 노형석 기자





유채와 목탄으로 사람 얼굴을 그린 1945년작 ‘무제’. 이스턴 재단 소장. 노형석 기자